25.11.30 세계의 절반을 받아안는 일
이옴므
·2025. 11. 30. 22:31
사랑을 시작한다는 건, 내 방의 창문을 열어 낯선 바람을 들이는 일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모르는 궤도를 도는 행성 하나가 통째로 내 마당에 쿵, 하고 내려앉는 일에 더 가까웠다.
당신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인디 밴드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는 평생 입에 대지 않던 향신료가 들어간 쌀국수를 먹는 법을 배운다. 당신의 옷소매에서는 낯선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나고, 당신의 말투에는 내가 가보지 못한 지방의 억양이 슴슴하게 배어 있다. 그렇게 당신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의 새로운 절반을 내게 가져온다. 나의 좁고 편협했던 지도는 당신이라는 영토를 만나 비로소 수정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랑이 늘 달콤한 확장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당신의 등 뒤에는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당신이 가끔 이유 없이 짓는 한숨, 밥을 먹다가 멈칫하는 순간, 혹은 잠들기 전 웅크린 등. 그건 당신의 부모, 당신의 가난, 혹은 당신을 스치고 간 실패들이 남긴 흉터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통이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심연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 심연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그 어둠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 주는 일이다.
문득 당신을 바라볼 때, 내 가슴속 어둑한 방에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을 느낀다. 당신이 가져온 그 낯설고 무거운 세계가 나의 세계와 섞이며 만들어내는 파동. 어쩌면 나는 당신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껴안음으로써,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해안선을 넓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곁에 둔다는 건, 그 사람이 가져온 좋은 것과 아픈 것, 빛과 그림자 모두를 내 삶의 목록에 추가하는 위대한 결심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당신의 손을 잡으며, 당신이라는 우주가 내게 건네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읽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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